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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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1435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난 이탈리아의 예술가로, 조각, 회화, 금속 공예 등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그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한 많은 제자를 길러 르네상스 미술 발전에 기여했으며,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아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다비드》, 《돌고래를 안은 풋토》, 《그리스도의 세례》 등이 있으며, 베네치아에서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을 제작하다 148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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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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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
본명 | 안드레아 디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데' 치오니 |
출생 | 1435년경 |
출생지 | 피렌체, 피렌체 공화국 |
사망 | 1488년 6월 30일 |
사망지 | 베네치아, 베네치아 공화국 |
국적 | 이탈리아 |
활동 분야 | 회화, 조각 |
활동 시기 | 이탈리아 르네상스 |
작품 | |
회화 | '토비아스와 천사' '그리스도의 세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공동 작업) |
조각 | '그리스도와 성 토마스' (청동 조각) '돌고래를 든 푸토' (청동 조각) '다비드' (청동 조각)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 (청동 조각 -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가 주조) |
후원자 | |
후원자 | 메디치 가문 |
영향 | |
영향을 받은 예술가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발음 정보 | |
영어 발음 | IPA: /vəˈroʊkioʊ/ 미국식 IPA: /vəˈrɔːk-/ |
이탈리아어 발음 | IPA: /anˈdrɛːa del verˈrɔkkjo/ |
2. 생애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 중 한 명이다. 본명은 안드레아 디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치오니(Andrea di Michele di Francesco Cioni)로, 1435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났다.[49] 그는 금세공인으로 경력을 시작하여 조각, 회화, 주조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으며,[38] 특히 조각가로서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의 예술 활동은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전성기를 맞이했다.
베로키오는 당대 최고의 예술 교육자 중 한 명으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피렌체 공방은 수많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중요한 교육의 장이었으며,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산드로 보티첼리, 피에트로 페루지노,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등 후대에 르네상스 미술을 이끈 거장들이 그의 지도를 받거나 영향을 받았다.[5][6][39]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기록하며 그의 교육적 역량을 칭송했다.[7]
아래는 베로키오의 스승과 제자로 알려진 주요 인물들이다.
구분 |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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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 [32][33] | 도나텔로 (확증 없음)[34] |
줄리아노 베키오 (실존 여부 불확실)[35] | |
알레소 발도비네티 | |
비토리오 기베르티 | |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 |
데지데리오 다 세티냐노 | |
필리포 리피 | |
제자 [36] | 레오나르도 다 빈치 |
산드로 보티첼리 (협력자였다는 설도 있음)[37] | |
피에트로 페루지노 | |
로렌초 디 크레디 |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 |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 |
프란체스코 디 시모네 페르루치 | |
아뇨로 디 폴로 | |
루카 시뇨렐리 | |
코지모 로셀리 | |
난니 그로소 (Nanni Grosso) |
베로키오는 생애 말년에 베네치아 공화국의 의뢰로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마상 제작에 착수했으나, 1488년 베네치아에서 작업을 마치지 못하고 병으로 사망했다.[8] 그의 유해는 피렌체로 옮겨져 산탐브로지오 교회에 안장되었다.[89] 그의 제자이자 상속인이었던 로렌초 디 크레디가 미완성 작품들을 마무리했다.[90]
2. 1. 초기 생애와 교육 (1435년 ~ 1460년대)
베로키오는 1435년경 피렌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치오니는 처음에는 타일과 벽돌 제조공으로 일하다가 나중에는 세금징수원이 되었다. 베로키오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형제자매 등 가족 구성원들의 생계를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다.그는 처음 금세공인의 견습공으로 예술가의 길에 들어섰다. 유명 조각가 도나텔로의 제자였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없다. 미술사학자 존 포프-헤네시는 베로키오 초기 작품의 양식이 도나텔로의 영향과는 거리가 멀다고 보았다. 또한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4] 이 외에도 알레소 발도비네티, 비토리오 기베르티, 베르나르도 로셀리노, 데지데리오 다 세티냐노 등 여러 예술가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제기된다.[32][33][34][35]
베로키오의 젊은 시절에 대해서는 기록이 많지 않다. 1452년, 동료와의 다툼 중 양모 직공을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1457년에 제출한 자산 보고서에서는 자신을 '금세공인'으로 밝히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나타냈다. 1461년에는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대리석 제단 조각 제작 공모전에 참여했지만 선정되지 못했다. 그는 피렌체에서 작업실을 운영했으며, 루카 성인 길드의 회원이었다.
2. 2. 피렌체에서의 활동과 메디치 가문의 후원 (1460년대 ~ 1480년대)

베로키오의 주요 작품 활동은 그의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이루어졌으며, 특히 메디치 가문의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의 후원이 그의 예술적 발전에 큰 힘이 되었다. 그의 작업실은 피렌체에 있었고, 그는 루카 성인 길드의 회원이었다. 이 작업실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렌초 디 크레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 후대에 이름을 알린 많은 예술가들이 견습생으로 활동하거나 거쳐갔다.[5] 조반니 산티는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젊은 필리피노 리피 역시 베로키오의 작업실을 방문하거나 일했다고 기록했다.[6]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평하며 그의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높이 평가했다.[7]
1460년대 후반부터 베로키오는 중요한 작품 의뢰를 받기 시작했다. 1466년, 그는 상업 재판소 평의회로부터 오르산미켈레 성당 외벽의 벽감을 장식할 청동 군상 성 토마스의 의심 제작을 의뢰받았다.[56] 이 자리는 원래 도나텔로의 작품이 있던 곳으로,[57] 베로키오는 1479년에 그리스도상을 완성했고, 전체 작품은 1483년 6월 21일에 설치되었다.[58] 바사리는 이 작품을 극찬했다.[59] 1468년에는 피렌체 시청 접견실을 위한 청동 촛대를 완성했다.[60]
같은 시기, 베로키오는 피렌체 대성당의 중요한 프로젝트에도 참여했다. 1467년과 1468년, 그는 폴라이올로, 루카 델라 로비아와 함께 대성당 꼭대기에 설치될 기념물 심의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61] 결국 그는 이 기념물 제작을 맡아 1468년부터 1471년까지 대성당 돔(쿠폴라) 위에 놓일 구리 구체와 십자가를 제작했고,[62] 1471년 5월에 성공적으로 설치했다. 이 작업에는 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도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469년, 베로키오는 석공·목공 조합에 가입했으며, 이 무렵 화가로서도 명성을 얻고 있었다. 그는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기마 창시합용 깃발을 그렸고,[63] 상업 재판소 홀을 장식할 '덕의 의인화' 연작 제작을 두고 폴라이올로와 경쟁하기도 했다. 비록 베로키오가 직접 수주하지는 못했지만, 이 연작 중 한 점은 그의 조수였던 보티첼리에게 맡겨졌다.[64] 또한 산 살비 수도원의 의뢰로 유명한 그리스도의 세례를 제작하기도 했다.
2. 3. 베네치아에서의 활동과 죽음 (1480년대 ~ 1488년)
1480년, 베로키오는 이전에 도나텔로가 사용했던 피렌체 대성당 건설국 뒤편의 공방으로 거점을 옮겼다.[77] 그가 떠난 원래의 공방은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가 이어받았다.[78]생애 말년에 베로키오는 베네치아에 새로운 작업실을 열고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기마상 제작에 집중했으며, 피렌체 작업실은 로렌초 디 크레디에게 맡겼다.[8] 1479년 7월 30일, 베네치아 공화국 정부는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청동 기마상 건립을 결정하고, 베로키오, 바르톨로메오 벨라노,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에게 시제품 제작을 의뢰했다.[79] 베로키오는 1481년과 1483년에 각각 실물 크기 말 모형과 납 모형을 베네치아로 보냈고, 이를 통해 최종 제작자로 선정되었다.[80]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큰 공헌을 한 용병대장이었다.[81] 그는 유언으로 대터키 전쟁 비용 10만 두카트를 기증하는 대신, 자신의 기마상을 산마르코 광장에 세워달라고 요청했다.[82] 하지만 공화정 체제 하의 베네치아는 도시 중심 광장에 개인 기념상을 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결국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 앞 광장에 세우기로 결정했다.[83]
1486년, 베로키오는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기마상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84] 그러나 1488년 6월 30일, 주조 작업 중 병을 얻어 베네치아에서 사망했다.[8] 그는 죽기 5일 전 유언을 통해 기마상 완성을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에게 맡겼으나, 최종적으로는 베네치아의 예술가인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가 완성했다.[85][86] 기마상은 1496년 3월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성당 광장에 설치되었다.[87]
베로키오의 유해는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에 의해 피렌체로 옮겨져 산탐브로조 성당에 안장되었다.[89] 베로키오가 제작 중이던 다른 작품들, 예를 들어 「성모와 세례자 요한」 등은 로렌초 디 크레디가 마무리했다.[89] 로렌초 디 크레디는 베로키오의 재산 관리인이자 주요 상속인이었다.[90]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스포르차 기마상 원형이 소실된 현재, 예술적, 기술적으로 15세기 조각사의 정점을 보여주는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88]
3. 주요 작품
베로키오의 공방은 젊은 화가들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의 작품으로 널리 인정받는 그림은 매우 적으며, 작품의 귀속에 대한 논란도 많다.[9] 그의 주요 작품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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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와 성 토마스'' ''줄리아노 데 메디치'', 1475년경~1478년, 국립미술관(워싱턴 D.C.) - --
3. 1. 조각

1465년경 베로키오는 산 로렌초 성당의 세정대 작업에 참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12] 또한 1465년에서 1467년 사이에 같은 성당 제단 아래 납골당에 코시모 데 메디치의 묘비를 제작했다.[91] 이는 현존하는 베로키오의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466년 피렌체 상업법정(Tribunale della Mercanzia)은 오르산미켈레 성당 동쪽 파사드의 벽감을 위해 청동 군상 ''그리스도와 성 토마스'' 제작을 의뢰했다.[56] 이 벽감은 원래 도나텔로의 작품이 있던 자리로,[57] 하나의 조각상을 위한 공간에 실물보다 큰 두 인물상을 배치해야 하는 과제가 있었다. 베로키오는 이 문제를 성공적으로 해결했으며,[13] 1479년 그리스도상이 완성되어 1483년 6월 21일에 설치되었다.[58] 이 작품은 공개되자마자 큰 찬사를 받았고 걸작으로 평가받는다.[13][59]
1468년에는 피렌체 시의회(Signoria of Florence)를 위해 높이 1.57m의 청동 촛대를 제작했으며,[60] 이 작품은 현재 암스테르담 국립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14] 같은 해, 그는 피렌체 대성당의 브루넬레스키 돔 위 등롱에 놓일 금색 구체(it) 제작 계약을 맺었다. 금도금한 구리판으로 만들어진 이 구체는 1471년 봄에 완성되어 돔 꼭대기에 설치되었다(십자가는 다른 사람이 제작).[15][62] 이 구체는 1601년 낙뢰로 파괴되었으나 1602년에 재건되었다.[15]

피에로 데 메디치는 베로키오에게 ''다윗'' 청동상 제작을 의뢰했다. 이 작품은 베로키오의 초기 경력을 대표하는 걸작으로, 1460년대 중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7] 도나텔로의 도발적인 다비드와는 달리, 베로키오의 다윗은 수수하게 옷을 입은 젊은 소년의 모습이다. 이 작품의 모델로 당시 공방에 있던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사용했다는 설이 전해진다.[19][96] 1476년, 피에로의 아들들인 로렌초와 줄리아노 데 메디치는 이 조각상을 피렌체 시의회에 150 플로린에 판매했으며,[97][98] 현재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8]
1470년경(추정 연도는 1465년에서 1480년까지 다양함) 베로키오는 돌고래를 안고 있는 풋토(날개 달린 아기 천사) 청동상을 완성했다. 이 작품은 원래 카레지 메디치 빌라의 분수를 위해 피에로 데 메디치가 주문한 것으로 여겨지며,[94][95] 후에 대공 코시모 1세가 피렌체 베키오 궁전의 분수로 옮겼다.[20] 현재 분수에는 복제품이 설치되어 있고, 진품은 1959년부터 베키오 궁전 내부에 보관되어 있다.[21]
1472년에는 산 로렌초 성당에 피에로와 조반니 데 메디치의 묘비를 완성했다. 이 묘비는 로렌초 데 메디치의 의뢰로 제작된 첫 작품 중 하나로,[102] 데지데리오 다 세티냐노의 '카를로 마르수피니의 묘비'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103] 같은 시기 로렌초의 의뢰로 제작된 세면대 역시 같은 방에 설치되었다.[102]
1470년대 후반에는 ''꽃다발을 든 여인'' 대리석 흉상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나, 모델이 누구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22] 로마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를 위해 제작된 프란체스카 토르나부오니의 묘비 부조 역시 현재 피렌체 바르젤로 미술관에 있다. 또한 줄리아노 데 메디치의 테라코타 흉상(1475년경~1478년, 국립미술관(워싱턴 D.C.) 소장)도 이 시기 작품이다.
1477년에는 피렌체 대성당 부속 산 조반니 세례당 제단의 장식 패널 중 하나인 ''성 요한의 참수''를 수주하여 1480년에 완성했다.[73][74] 이 부조는 잔혹한 장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1478년, 로렌초 데 메디치의 중재로 피스토이아 대성당에 설치될 니콜로 포르테게리 추기경 기념비 제작을 의뢰받았다.[75] 하지만 이 작업은 베로키오가 1483년 베네치아로 떠나면서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고,[16] 그의 사후 제자들과 후대의 예술가들에 의해 완성되었다. 베로키오가 직접 작업한 부분은 그리스도상과 작품 왼쪽의 '신앙'을 의인화한 부분 정도로 추정된다.[76]
1479년 7월 30일, 베네치아 정부는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의 청동 기마상 건립을 결정하고 베로키오 등에게 시제품 제작을 요청했다.[79] 베로키오는 1483년까지 두 차례 시제품을 보냈고, 제작 의뢰를 받게 되었다.[80] 콜레오니는 유언으로 자신의 기마상을 산마르코 광장에 세울 것을 요청했으나,[82] 공화국 정부는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산 조반니 에 파올로 광장에 세우기로 결정했다.[83] 베로키오는 1486년 베네치아로 이주하여 본격적인 제작에 착수했으나,[84] 1488년 6월 30일 사망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에게 작업이 맡겨졌으나, 최종적으로는 베네치아의 예술가 알레산드로 레오파르디가 완성하여[85][86] 1496년 3월 광장에 설치되었다.[87] 이 기마상은 15세기 조각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다.[88]
3. 2. 회화



베로키오의 공방은 젊은 화가들의 교육에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그의 작품으로 널리 인정받는 그림은 매우 적으며, 작품 귀속에 대한 논란도 많다.[9]
판넬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앉은 아기 예수와 함께한 마돈나''는 1468년에서 1470년 사이에 제작된 초기 작품으로 여겨지며, 현재 베를린 국립박물관의 회화관에 소장되어 있다.[10]
런던 국립미술관(목록번호 NG2508)에 소장된 ''두 천사와 함께한 성모자''(판넬에 템페라 기법)는 이전에는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2010년경 청소 및 복원 작업을 거친 후 약 1467년에서 1469년 사이에 베로키오가 그린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4]
토비아스가 아버지의 눈을 치유할 물고기를 들고 대천사 라파엘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작은 판넬 그림 ''토비아스와 천사''는 개인적인 경건함을 위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작품은 초기 작품으로, 이전에는 폴라이올로 형제나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잘못 귀속되기도 했다. 미술사학자 코비는 이 그림이 기를란다요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1]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는 1474년에서 1475년 사이에 그려졌다. 이 작품 제작에는 당시 그의 공방에 있던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참여하여 왼쪽의 천사와 위쪽 배경 일부를 그렸다.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제자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능가했기 때문에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지만, 후대 비평가들은 이 이야기를 허구로 여긴다.
''성 요한 세례자와 성 도나토와 함께한 옥좌에 앉은 마돈나''는 피스토이아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미완성 상태로 남았다가 베로키오가 생애 말년에 베네치아에 있을 때 로렌초 디 크레디에 의해 완성되었다.
3. 3. 기타
4. 공방과 제자들
베로키오의 공방은 피렌체에 위치했으며, 르네상스 시대 중요한 예술 교육 및 제작의 중심지였다. 이 공방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의 후원을 받으며 명성을 얻었다.[5]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렌초 디 크레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와 같은 여러 위대한 예술가들이 그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거나 협력했다.[5] 또한 조반니 산티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그리고 젊은 필리피노 리피도 베로키오의 공방을 방문하거나 일했다고 한다.[6] 당시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기록하며 공방의 높은 위상을 보여주었다.[7]
생애 말년에 베로키오는 베네치아에 새로운 공방을 열고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 제작에 집중했으며, 피렌체 공방은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에게 맡겼다.[8]
4. 1. 공방 운영
베로키오의 공방은 피렌체에 위치했으며, 그는 루카 성인 길드의 회원이었다. 그의 공방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의 후원에 힘입어 크게 발전했으며,[5] 당대 피렌체 예술의 중심지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기록하며 그의 공방이 지닌 영향력을 보여준다.[7]베로키오의 공방은 수많은 뛰어난 예술가들을 배출한 교육의 장이었다. 그의 공방에서 견습생으로 일했거나 협력했던 주요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다.
구분 | 주요 인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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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적인 제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렌초 디 크레디 |
그 외 제자 및 협력자 |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필리피노 리피[5][6] |
이들의 초기 작품 중 일부는 스승인 베로키오의 작품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5]
특히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베로키오 공방 출신의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경, 14세의 나이로 베로키오의 제자가 되었다.[107][109]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가 아들의 뛰어난 재능을 알아본 친구 베로키오에게 소개하여 제자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110][40] 레오나르도는 공방에서 약 10년 이상 머물며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122]
1472년, 레오나르도는 성 루카 조합에 화가로 등록되어 독립할 자격을 얻었다.[118] 같은 해 등록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세르 피에로의 아들, '''화가''' 레오나르도는 이 등록부의 2면에 걸쳐 기입한 바와 같이, 당 조합을 위해 그가 누리는 혜택에 대한 사례금으로 6솔도를 1472년 6월까지 납부할 의무를 진다』[118]
이는 레오나르도가 이미 스승이 될 자격을 갖추었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후에도 한동안 베로키오의 공방에 남아 활동했다. 1476년 기록된 살타렐리 사건 관련 문서에는 레오나르도가 여전히 베로키오 공방 소속으로 언급되어 있다.[119][120] 이 사건은 당시 베로키오 공방과 경쟁 관계에 있던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공방 측의 음해 공작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21]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피고인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베로키오와 레오나르도는 ''그리스도의 세례'' (1474년-1475년경)와 같은 작품을 함께 제작하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레오나르도는 왼쪽 천사와 배경 일부를 그렸는데, 바사리는 레오나르도의 뛰어난 실력에 감탄한 베로키오가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고 기록했지만, 이는 후대의 창작으로 여겨진다.[115] 오히려 베로키오는 회화 부문을 레오나르도에게 맡기고 자신은 조각에 더욱 집중했을 가능성이 있다.[40]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가 피렌체 대성당 돔 꼭대기의 청동 구체를 제작할 때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116][117]
베로키오의 공방은 단순한 미술 교육 기관을 넘어, 다양한 예술 및 공예 작업을 수행하는 종합적인 디자인 스튜디오였다.[40] 1470년대 공방에서 다루었던 주요 분야는 다음과 같다.
분야 | 세부 내용 |
---|---|
미술 | 회화 (템페라, 프레스코화), 조각 (청동, 대리석), 판화, 모자이크, 원근법 및 기하학 연구 |
공예 | 금속 세공 (귀금속, 비귀금속 가공, 청동 주조, 니엘로 상감), 목재 세공, 준보석 세공, 에나멜 세공 |
디자인 및 제작 | 가구, 축제 장식, 기마 경기 장비, 무대 장치, 폭죽, 분수 등[125][126] |
이처럼 베로키오 공방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기술과 예술 형식을 다루었으며, 이는 제자들이 다재다능한 예술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124][126]
베로키오의 구체적인 교육 방식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지만, 제자였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을 통해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의 필기 「그림의 책」에 따르면,
:1. 화가는 「자연」을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화가가 다른 사람의 그림을 본보기로 삼는다면, 볼 만한 구석이 거의 없는 그림만 제작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을 배우면, 우리가 조토 디 본도네와 마사초 등 로마 이후 화가들에게서 인정하는 것처럼 훌륭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128]
:2. 연구의 순서. 젊은이는 첫째로 원근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로 대상의 크기와 형태, 셋째로 훌륭한 신체에 익숙해지기 위해 훌륭한 스승의 필치를 배워야 한다. 배운 내용의 이치를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 자연을 직접 관찰하는 것이 좋다. 그리고 여러 명장의 필치를 살펴보는 것. 예술을 만드는 습관을 들이는 것. 「연습하여 많은 작품을 만들려면, 여러 스승들이 종이와 벽에 그린 각종 구도를 베끼는 데 첫 단계를 할애하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연습도 빨리 훌륭한 실력을 갖추게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훌륭한 구도를 가지고 학구적인 스승의 작품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 방법으로도 훌륭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스승은 매우 드물고 거의 찾아볼 수 없으므로, 서투른 작품을 배우고 나쁜 버릇을 들이는 것보다 자연을 배우는 것이 확실하다.[129]
:3. 화가는 관객을 자신 쪽으로 끌어들이고, 큰 감탄과 흥미로 사람들을 사로잡는 작품을 제작하는 데 힘써야 한다. 그러나 이론을 알기 전에 연습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 버리면, 예술을 배우는 탐욕스러운 마음이 예술로부터 당연히 얻을 수 있을 빛나는 영광을 깨뜨릴 것이기 때문이다.[130]
바사리(Vasari)의 「예술가 열전」에 따르면,
:「베로키오는 자연의 사물, 즉 실제의 손, 발, 무릎, 다리, 팔, 몸통 등을 석고로 본을 떠서 그것을 앞에 두고 찬찬히 모사했다.」고 한다.[131]
이러한 체계적이고 실질적인 교육 방식은 보티첼리, 페루지노, 레오나르도와 같은 거장들을 배출하는 원동력이 되었다.[127]
생애 말년에 베로키오는 베네치아에 새로운 공방을 열어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 제작에 집중했으며, 피렌체 공방은 제자 로렌초 디 크레디에게 맡겼다. 그는 1488년 베네치아에서 사망했다.[8]
4. 2. 주요 제자
베로키오의 작업실은 피렌체에 있었으며, 그는 루카 성인 길드의 회원이었다. 그의 작업실은 당대 중요한 예술 교육 기관으로 기능했으며, 여러 위대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견습생으로 활동했다. 가장 유명한 제자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있다. 레오나르도는 1466년경 14세의 나이로 베로키오의 공방에 들어와[107][109] 약 10년 이상 머물며 다양한 기술을 익혔다. 바사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의 재능에 감명받은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가 친구인 베로키오에게 소개하여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110][40] 레오나르도는 베로키오의 작품 ''그리스도의 세례'' 제작에 참여하여 왼쪽 천사와 배경 일부를 그렸는데,[5] 바사리는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의 실력에 감탄하여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고 전하지만 이는 후대의 창작으로 여겨진다.[115] 레오나르도는 1472년 성 루카 조합에 화가로 등록하여 독립할 자격을 얻었으나[118], 1476년 남색 혐의로 고발된 살타렐리 사건 기록에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 쪽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라고 기재된 것으로 보아[120] 이후에도 한동안 공방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레오나르도 외에도 로렌초 디 크레디는 베로키오의 중요한 제자였으며, 베로키오가 베네치아로 떠난 후 피렌체 작업실을 맡아 운영했고[8], 스승이 미완성으로 남긴 피스토이아 대성당의 ''성 요한 세례자와 성 도나토와 함께한 옥좌에 앉은 마돈나''를 완성했다.
다른 주요 제자들로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훗날 미켈란젤로의 스승),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훗날 라파엘로의 스승) 등이 있으며, 이들의 초기 작품은 스승 베로키오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이다.[5] 조반니 산티는 산드로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젊은 필리피노 리피 역시 베로키오의 작업실을 방문하거나 일했다고 기록했다.[6]
당대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7] 표현하며 베로키오 공방의 높은 명성과 교육 수준을 증언했다. 베로키오 공방에서는 회화, 조각뿐만 아니라 금속 세공, 건축 스케치, 원근법 등 다방면에 걸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125], 이는 르네상스 시대의 다재다능한 예술가 양성에 기여했다.[126]
5. 평가 및 영향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는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뛰어난 공방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조각, 회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특히 조각 분야에서 두드러진 업적을 남겼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다윗 청동상과 베네치아에 세워진 바르톨로메오 콜레오니 기마상 등이 꼽힌다.
베로키오의 공방은 당대 최고의 예술 교육 기관 중 하나였다. 그의 공방은 단순한 작업 공간을 넘어, '장인-조수-견습생'으로 이어지는 체계 속에서 예술품 제작과 교육이 함께 이루어지는 공동체였다.[123] 금세공 기술을 바탕으로 다재다능한 예술가를 양성하는 피렌체의 전통 속에서, 베로키오의 공방 역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렌초 디 크레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수많은 예술가들을 배출했다.[5] 조반니 산티는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젊은 필리피노 리피 등도 그의 공방을 거쳐 갔다고 기록했다.[6]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표현하며 그의 교육적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7]
베로키오 공방에서는 다음과 같은 다양한 기술과 학문을 다루었다.[125]
분야 | 세부 내용 |
---|---|
회화, 조각, 판화, 프레스코화, 모자이크 | |
목재 세공, 준보석 세공, 흑금상감, 에마유(에나멜), 귀금속·비귀금속 가공, 청동 주조 | |
원근법, 기하학 연구 | |
가구 제작, 축제 장식, 기마 경기 장비, 무대 장치, 폭죽, 분수 설계 등 |
이처럼 베로키오 공방은 특정 분야에 국한되지 않고 폭넓은 기술과 지식을 가르쳤는데, 이는 당시 예술가들이 다방면에 걸쳐 역량을 키우고자 했음을 보여준다.[126]
베로키오의 구체적인 교육 방식은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으나, 제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남긴 기록을 통해 당시 공방의 교육 철학을 엿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화가가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며,[128] 원근법과 대상의 형태를 익힌 후, 훌륭한 스승의 기법을 배우고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여러 거장의 작품을 연구하는 순서로 학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129] 또한 그는 이론 없는 실습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관객에게 감동을 주는 작품 제작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130] 바사리는 베로키오가 실제 인체의 손, 발 등을 석고로 본떠 이를 보고 정밀하게 모사하는 방식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다고 전하는데,[131] 이는 자연을 중시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추구했던 그의 교육 방침을 보여준다.
베로키오의 작품과 그의 공방을 통해 배출된 제자들은 르네상스 미술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예술적 유산과 교육 방식은 후대 예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6. 베로키오와 관련된 논란 및 흥미로운 사실
베로키오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몇 가지 불확실한 점이 있다. 그가 유명 조각가 도나텔로의 견습생이었다는 주장이 있지만, 이를 뒷받침할 명확한 증거는 부족하며 미술사학자 존 포프-헤네시는 그의 초기 작품 스타일과 모순된다고 보았다. 또한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 밑에서 그림을 배웠다는 설도 있다.[4]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평생 결혼하지 않았고 가족들의 생계를 부양해야 했다. 그의 예술적 발전은 로렌초 데 메디치와 그의 아들 피에로의 후원에 크게 힘입었다.
베로키오의 피렌체 작업실은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배출한 곳으로 유명하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비롯하여 로렌초 디 크레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이 그의 문하에서 실력을 갈고 닦았다.[5] 조반니 산티의 기록에 따르면 보티첼리, 루카 시뇨렐리, 젊은 필리피노 리피 역시 베로키오의 작업실을 방문하거나 함께 일했다고 한다.[6] 당시 피렌체의 시인 우골리노 베리노는 "화가들이 가진 좋은 것들은 모두 베로키오의 샘에서 마셨다"고 평하며 그의 영향력을 높이 평가했다.[7]
6. 1.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의 관계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베로키오의 작업실에서 견습생으로 일했던 여러 위대한 예술가 중 가장 유명하다.[5] 바사리에 따르면,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세르 피에로 다 빈치는 아들의 뛰어난 데생과 조각 솜씨에 감명받아 친구였던 베로키오에게 작품들을 보여주었고, 베로키오 역시 크게 감탄하여 1466년경 당시 14세였던 레오나르도를 제자로 받아들였다고 한다.[110][40][107] 당시 피렌체 상공 조합 규정, 바사리의 기록, 일반적인 도제 기간 등을 고려할 때 이 시기가 유력하다.[109] 레오나르도는 사생아였으나 당시에는 세르 피에로의 유일한 자녀였다.[111] 처음 2년간은 작업실에 기거하다 이후에는 아버지 집에서 통학한 것으로 보인다.[112][113] 일각에서는 피에로 데 메디치가 레오나르도의 공방 입문에 개입했다는 설도 제기되는데, 레오나르도가 남긴 "메디치가 나를 만들고, 그리고 멸망시켰다"[114]는 말이 그 근거로 제시되기도 한다.베로키오의 작업실은 당시의 다른 공방처럼 미술 교육과 디자인 스튜디오의 기능을 겸했다. 레오나르도는 바닥 청소 같은 잡일부터 시작해 점차 그림 제작을 돕는 단계로 나아갔고, 20세 무렵에는 독립적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40] 이 시기에 베로키오의 작품 우피치 소장 ''그리스도의 세례'' 제작에 참여하여 왼쪽의 천사를 그렸다고 알려져 있다.[40]
바사리는 레오나르도가 그린 천사가 스승인 베로키오의 것보다 뛰어나, 이에 충격을 받은 베로키오가 다시는 붓을 들지 않았다는 유명한 일화를 전하지만, 이는 후대의 창작일 가능성이 크다.[115] 다만, 이 시기 이후 베로키오가 작업실의 회화 부문을 레오나르도 등에게 맡기고 자신은 주력 분야인 조각에 더 집중했을 것이라는 추정은 가능하다.[40]
또한, 1468년부터 1471년까지 베로키오가 제작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돔 꼭대기의 청동 구체 작업에도 레오나르도가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노트에 "우리가 피렌체 대성당의 구체를 접합한 방법을 기억하고 있다"고 적어 자신이 설계에 관여했음을 시사했다.[116] 그는 이 구체를 올리는 데 사용된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기계에도 깊은 관심을 보이며 스케치를 남기기도 했다.[117]
한편, 베로키오가 1460년대 중반에 제작한 청동상 ''다윗''의 모델이 젊은 레오나르도였다는 설이 전해진다.[19] 이 작품은 도나텔로의 도발적인 다윗상과 달리 수수하게 옷을 입은 소년의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1472년, 레오나르도는 성 루카 조합에 화가로 등록되어 독립적인 활동 자격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등록부에는 "『세르 피에로의 아들, '''화가''' 레오나르도는 이 등록부의 2면에 걸쳐 기입한 바와 같이, 당 조합을 위해 그가 누리는 혜택에 대한 사례금으로 6솔도를 1472년 6월까지 납부할 의무를 진다』" 라고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스승이 될 자격을 이미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18]
하지만 독립 자격을 얻은 후에도 레오나르도는 한동안 베로키오의 공방에 머물렀던 것으로 보인다. 1476년, 레오나르도가 다른 세 명과 함께 남색 혐의로 고발된 이른바 살타렐리 사건[119] 기록에 그의 이름이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 쪽 세르 피에로의 아들 레오나르도"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120] 이 사건은 당시 베로키오 공방과 니콜로 포르테구에리 추기경 기념비 제작을 놓고 경쟁하던 안토니오 델 폴라이올로 공방 측의 모함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당시 피렌체에서는 익명의 투서함(탄부리)을 통한 고발이 쉬웠기 때문에, 경쟁 공방의 주요 인물이었던 레오나르도를 곤경에 빠뜨리려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121] 레오나르도를 포함한 피고발인 네 명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레오나르도는 최종적으로 1478년 또는 1479년까지 베로키오의 공방에 머물렀던 것으로 추정되며, 조수 기간을 포함하여 약 10년 이상 베로키오 밑에서 다양한 기술과 지식을 습득했다. 이 시기 공방에서 제작된 피스토이아 대성당 제단화 ''수태고지''(1479년경)는 레오나르도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길란다이오가 템페라로 밑그림을 그린 후, 레오나르도가 로렌초 디 크레디를 지도하며 함께 완성한 협업 작품으로 본다.[122]
6. 2. 이름의 유래
베로키오의 본명은 안드레아 디 미켈레 디 프란체스코 치오니이다.[42] '델 베로키오'라는 이름은 1467년부터 기록에 나타나는데,[46] 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가장 널리 알려진 설 중 하나는 그의 초기 후원자였던 피렌체의 유력 귀족 가문인 베로키오 가문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것이다.[46] 다른 한편으로는 '베로키오'가 Vero Occhioita('진짜 눈')를 의미하며, 이는 그의 뛰어난 예술적 안목을 나타내는 별명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이 해석은 그가 생전에 얻었던 높은 존경과 명성을 반영하는 것으로 여겨진다.[40] 또한, 그의 스승이었다고 전해지는 금속 세공사 줄리아노 베키오의 이름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제기되지만, 이 주장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47][48]
6. 3. 살인 혐의
베로키오의 이름이 처음 기록된 것은 상해치사 사건과 관련해서이다. 1453년 피렌체 공화국의 재판 기록에 따르면, 1452년 동료와 싸우던 중 양모 직공 Antonio di Domenico|안토니오 디 도메니코it의 머리에 돌을 던져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결과적으로 과실치사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45]6. 4. 작품 귀속 문제
베로키오의 공방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 로렌초 디 크레디, 도메니코 기를란다요, 프란체스코 보티치니, 피에트로 페루지노 등 많은 제자 및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하는 협업 시스템으로 운영되었다.[5] 이러한 작업 방식 때문에 베로키오 본인의 작품으로 확실하게 귀속되는 그림은 매우 적으며, 작품의 실제 제작자를 밝히는 데 어려움이 따른다.[9]판넬에 템페라 기법으로 그린 '''앉은 아기 예수와 함께한 마돈나''' 그림(현재 베를린 국립박물관, 베를린 회화관 소장)은 1468년에서 1470년 사이의 초기 작품으로 여겨진다.[10]
런던 국립미술관(목록번호 NG2508)에 소장된, '''두 천사와 함께한 성모자''' 그림(판넬에 템페라 기법)은 이전에는 베로키오의 작품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나, 2010년경 청소 및 복원 작업을 거친 후 약 1467년에서 1469년 사이에 베로키오가 그린 작품으로 재평가되었다.[4]
토비아스가 아버지의 눈을 치유할 물고기를 들고 대천사 라파엘과 함께 여정을 떠나는 모습을 그린 작은 판넬 그림인 '''토비아스와 천사'''는 아마도 개인적인 경건한 그림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이전에는 폴라이올로와 다른 화가들의 작품으로 잘못 귀속되었던 초기 작품이다. 코비(Covi)는 이 그림이 기를란다이오(Ghirlandaio)의 도움을 받아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현재 런던 국립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11]
현재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세례'''는 1474년에서 1475년 사이에 그려졌다. 이 작품에서 베로키오는 당시 그의 공방에 있던 젊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도움을 받았는데, 레오나르도는 왼쪽의 천사와 위쪽 배경 일부를 그렸다. 조르조 바사리에 따르면, 안드레아는 제자 레오나르도가 자신을 능가했기 때문에 다시는 붓을 잡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하지만, 후대 비평가들은 이 이야기를 허구로 여긴다.
'''성 요한 세례자와 성 도나토와 함께한 옥좌에 앉은 마돈나'''는 피스토이아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미완성으로 남았다가 베로키오가 생애 말년에 베네치아에 있을 때 로렌초 디 크레디에 의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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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オナルド・ダ・ヴィンチの手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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レオナルド・ダ・ヴィンチの手記 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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画家・彫刻家・建築家列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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